반가운 비
온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난생 처음 경험해본 싱겁고도 어정쩡한 겨울이였다.
겨울의 흰눈은 북방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온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지는 함박눈을 향유하는것은 북방사람들의 당연한 특권이다. 남방처럼 사철 푸르름도 기대할수 없는 북방에 만약 눈마저 내리지 않는다면 그 겨울은 실로 속이 빈 쓸쓸한 계절일수밖에 없다. 비록 제설이 시끄럽고 폭설은 엄한과 크고작은 피해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나에겐 겨울이라면 그래도 그 백설의 세계, 그것이 사랑이든 횡포든 눈이 펼쳐져야 겨울다운 겨울이였다.
이제 겨울이 깊어지면 아무때든 틀림없이 눈이 오겠지 하는 믿음이 남아있었기에 초겨울에는 그래도 기다리는 멋이라도 있었다. 허지만 그 믿음은 공허한것이였다. 래일래일하며 목이 빠지게 학수고대를 해도 설이 지나고 소한이 지나고 대한에 이어음력설마저 훌쩍 지나가버렸어도 눈이 내릴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함박눈은 고사하고 싸락눈도 내리지 않자 강변 썰매터에서는 조설기가 동원되여 인공눈산을 만드는 역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따분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하염없이 눈을 바라는 나의 심정은 차차 초조감을 넘어목마른 그리움으로 번져갔으나 그런건 알바가 아니라는듯 겨울은 야속하게 물러갔고 일력상으론 어언 봄의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아니라면 비라도 시원히 와주소서. 하고 속으로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였지만 봄철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봄이 봄같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근년에 해일이나 황사가 자주 기승을 부리는데다 빙산의 해빙이며 북극 동물의 떼죽음이며 기상이변이 속출해 뭔가 좀 상서롭지 못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작심이나 한듯 봄비마저 린색하게 굴다보니 나는 속이 다 갑갑해났다. 봄 가물이 우려되는 가운데 하늘은 혹시 한해강설량, 강우량을 꽁꽁 재워두었다가 여름내내 맹렬한 폭우나 장마라도 몰고올 심산은 아닌지 하는 위구심까지 겹치였다.
이래저래 답답하고 실망이 한계점에 이르렀던 4월중순경 문뜩 나의 기분을 일백팔십도로 돌려놓는 이변이 나타났다. 련 며칠 여름같은 고온이 이어지더니 부르하통하 강변 호수가에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여났다. 례년보다 일찍두주일 앞당겨졌다는 말도 들리였다. 때를 같이하여 버드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신록이 물들면서 실버들이 미풍에 흐느적이는가 하면 키높은 백양나무들도 약속이나 한듯 새순이 돋아나면서 먼지를 들쓴 회색의 도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것 같았다.
생각밖이였다. 원림의 나무들에 뽀족뾰족 새순이 청초했다. 자리앓이를 잘하는 옮겨다 심은 자작나무가지에도 미세한 새잎들이 간간이 눈에 띄였다. 불가사의한 광경이라 할가, 원림뒤켠 뉘집 창고 세멘트지붕 틈사리에 어떡하다 애나무 몇그루 자라고있었는데 손가락처럼 얀한 그 애나무조차 고운 새잎들을 달고있었다.
거리가 깨여난듯 우아한 활엽가로수 프랑스오동이 어느새 새잎으로 단장을 바꾸었다. 기대도 걸지 않았던 변화가 새 가로수가지들이 잘린채 새로 심어진 말뚝같은 버드나무에서도 못참겠다는듯 앙증맞은 이파리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있었다.
산속이 들떠있었다. 마침 친구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가보았더니 동산골짜기 길섶에 민들레며 쑥이며 이름모를 풀들이 파릇파릇했고 산비탈의 떡갈나무, 소나무, 이깔나무 혼성림이 연한 초록색, 진한 록색으로 빛났다. 누군가 큰 붓을 날린듯 산발을 타고 여기저기서 연분홍 진달래가 반기였다. 정상에 올라가보니 우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4월의 빛나는 하늘아래 키넘게 무더기로 피여난 진달래가 산마루 도처에 흐드러져 장관을 이루고있었다. 고요한 산중은 넘쳐나는 서정으로 설레이고있었다.
대지는 관용으로 위대한것인가? 수분을 갈망하는 목마른 땅일텐데. 나의 괜한 조바심이며 원망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대지는 제철에, 아니 계절을 훨씬 앞질러서 신록의 싱그러움을, 고요속의 꽃다운 서정을 일궈낸것이다.
뭐가 뭔지 일순 아리숭했다. 글쎄 땅에 자라는 풀과 나무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위에 자란 나무는 어떻게 수분섭취를 하며 그 뉘집 창고 세멘트지붕의 애나무는 또 어떻게 수액장만을 했다는 말인가? 단지 온도와 먼지와 해빛만으로도 생명은 꽃피게 돼있는것인가?
말없는 계절의 속내를 시원히 알지를 못해 못내 아쉬웠다. 허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판독불능이 뭐 대수인가, 신비는 신비대로 남겨두고 일단 이상기후임에도 자연의 내적인 질서는 살아있고 유효하다는 결과만을 인정하고 반기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눈도 비도 거두절미한 계절의 헝클어진질서의 한켠으로 기적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질서의 시스템이 작동된것만은 분명하다. 음산한 선률의 서곡이 막을 내리자 격정을 뿜어내는 매혹적인 본악장이 본격적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것이다.
지꿎은 이상기후에 아랑곳없이 신록을 몰고오는, 내면의 깊이를 간직한 대지의 여유로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상일기의 까다로움에 일희일비하거나 당황망조하지 않는 자연의 웅숭깊음이 탄복을 자아낸다.
사람도 이런 웅숭깊음을 좀 닮았으면 얼마나 좋으랴싶다.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심리나 정서라는건 너무나 촐랑거리는것 같아 자괴지심을 금할수 없다. 돌이켜보면 나의 생활도 질서없이 뒤죽박죽이 될 때가 있었고 맞갖지 않은 일로 고민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 어떤 몰리해때문에 누군가로부터 공연히 미움을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별로 시답잖은 일이라고 해도 그럴 때면 상대방에 대한 옹졸한 감정이 치밀면서 저도 몰래 불평분노가 비등하기가 십상이였다.
사실 이럴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무언의 미》라는 말도 있다싶이 이런 고비에 생각을 조금만 더 깊게 가지면 기분이 개운해질수가 있고 미구하여 정리가 뒤따르고 리해와 자성과 아량이 찾아들수도 있다.
중요한것은 이렇게 갇히지 않고 넉넉한마음이 우세하면 사람은 평소에 미처 통찰하지 못했던 복잡한 사물의 전모와 실상에 좀더 근접할수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 일이 지나가고나서야 알게 되군 하지만 그 전모나 진상이라는것은 예상밖으로 자기의 자의적인 옹졸한 생각과는 천양지차일수도 있는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글을 쓴다는 일도 그렇고 현실의 대소사와 력사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아무리 수고를 거듭해도 글이 엉성해지는것은 생각이 설익어서 표면에서 갈팡질팡하기때문이다. 자의적인 짧은 자대로 성급하게 현실을 재단하고 력사를 평가할 때 우리는 옳바른 결론을 기대할수 없게 된다. 우리가 만나고싶어하는 기적, 우리가 찾아헤매는 보물상자는 첩첩산중 잣나무숲속의 진귀한 인삼처럼 어둠속 깊숙이 숨어있는것이다. 나무도보고 수풀도 볼수 있는 내면의 깊은 시계(視界)가 그처럼 부럽고 소중한 까닭도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너무나도 오랜 숨막힌 기다림이였는데 이게 웬일이냐싶게 오늘 점심나절부터 예고없이 봄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묵은 대기를 시원하게 바꿔놓으며 올해 들어 처음 내리는 비다운 비다. 길이 제법 질척거리고 랭기가 옷깃으로 스며들어도 밉지 않은 비다.
4월하순에야 내린 반가운 비, 갓 심은 가로수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흐뭇해할것 같다. 전야에서 씨붙임을 하는 농민들도 혹시 후 안도의 긴 숨을 내쉬지 않을가싶기도 하지만 실은 그래서만 이 시각이 반가운 것이 아니다. 애타는 마음을 달래며 난생처음 겪어본 색다른 체험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듯하다. 쓸쓸하고 어정쩡한 겨울과 습도가 모자라는 메마른 봄의 긴 려로에서 밀려드는 초조감을 넘어 인내를 배우며 나는 급기야 풍경밖의 풍경을 볼수 있었다. 그 웅숭깊은 계절의 질서를 말이다.